‘화단의 이방인’ 전광영의 ‘My Way’

정중헌/조선일보 논설위원

그것은 착시(錯視)현상일까. 전시장에 들어서자 마치 화성이나 달표면을 거니는 느낌이 들었다. 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건만 돌더미와 자갈밭, 물이 없는 모래길을 끝도 없이 헤매는 기분이었다. 때로는 바위들이 무너져 내린 깊은 협곡으로 낙하하는 현기증이 일기도 했다. 전광영의 작품은 한지가 매재(媒材)다. 그런데 화성이나 달 같은 미지의 세계를 유영하는 생소한 체험을 하는 느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종이란 얇고 그 자체로는 정립하기가 어렵다. 한데 스티로폼이라는 물체에 포장되어 모자이크하듯 군집을 이루면 전혀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크고 작은 돌기들이 조명을 받아 명암(明暗)을 이루면 거대한 돌산도 되고 계곡도 되고 때로는 강변의 자갈밭을 연상케도 한다. 전광영의 작품을 단순히 종이 부조(浮彫)나 미니멀리즘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것은 이같은 조화와 변주로 물성(物性) 그 이상의 아우라(분위기)를 연출해내기 때문이다. 더욱이 단일 작품이 아니라 몇개의 방에 시대별로 거대한 종이작업들이 전시되었을 때 그 공간은 평면과 입체가 아닌 하나의 통합을 이루며 일찍이 체험하지 못한 기묘한 분위기를 체감하게 만든다.

끝없이 펼쳐진 돌산과 자갈밭을 헤매다보면 마침내 거대한 석주(石柱)들과 마주친다. 작가가 이번 초대전을 위해 특별제작한 설치작품으로, 지름 1m 높이 3m의 원기둥 12개를, 세워 수만개의 봉지를 매단 것이다. ‘종이기둥’, ‘종이나무’로 불릴만한 이 입체작업은 종이의 기능을 확장시켰을 뿐 아니라 조명과 어우러져 원시의 장엄한 건축물을 연상시킨다. 그 종이 신전(神殿) 기둥 사이로 작가 전광영의 모습이 비쳤다. 그와 대면하자 만감이 교차했다. 자그만한 체구, 다부진 눈, 초청인사들과 담소를 나누는 그의 표정은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42.195km의 마라톤 코스를 완주한 선수같았다, 초반부터 넘어지고 온갖 장애물에 부딪치는 험난한 레이스였다. 중반의 슬럼프가 너무도 길어 그는 화단을 떠날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뛰고 도 뛰어 마침내 관중들의 박수를 받기 시작했고 드디어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전’ 주인공이 된 것이다.
20여년간 이 작가의 레이스를 지켜본 기자로서 느끼는 감회는 남다를 수 밖에 없다. 그가 얼마나 지쳤었고 숨가빴는지, 그리고 온갖 시련을 뚫고 다시 뛰기위해 얼마나 이를 악물었는지 아는 저널리스트는 감정이 벅차 아무런 축하의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해낼 줄 알았소. 결국은 해냈구려.” 이런 말이 입속에서 맴돌 뿐 눈가에 이슬대문에 작가를 또렷히 보기가 힘들었다.

필자가 조선일보 미술기자로 화가 전광영을 만난 것은 70년대 후반이었다. 당시 그는 미국에서 돌아와 국내 화단에 뿌리를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연히 대화는 미국유학 쪽으로 기울였다. 강원도 출신인 그는 경제적 여유는 있으나 완고한 선친의 반대에 부딪쳐 출발부터 험난한 화가의 길을 걸어야 했다. 홍익대 미대를 나와 미국 유학길에 올랐으나 경제적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학업과 생활을 병행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무리였다. 명문으로 꼽히는 필라델피아 미술대학원에 진학했으나 당장 끼니가 걱정이었으나 작업인들 제대로 하기가 어려웠다.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도 해보았으나 가난을 면할 길이 없었다. 춥고 배고픈 유학생활, 그는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쓰레기통을 뒤졌다는 얘기도 했다. 중병에 걸려 생사를 헤매다가 가까스로 회복했다는 대목에서는 눈물을 글썽였다. 참으로 충격적이고 참혹한 유학생활이었지만 그는 학업을 마치고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필라델피아와 뉴욕에서 4회의 개인전도 열었다.

이런 역경을 딛고 화가가 되어 귀국한 그를 환영해주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77년 미술회관에서 작품전을 열었건만 국내 화단의 반응은 냉담했다. 필자가 조선일보 지면에 작은 박스기사를 싣는 등 몇몇 매스컴에서 관심을 보였지만 이름을 알리기에는 너무도 미미했다.
국내 화단에서 화려한 재데뷔를 원했던 그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당시만 해도 해외유학파는 프리미엄이 붙던 시절이었으나 그마저도 그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았다. 그도 남들처럼 그룹전에도 참여하고 공모전 입상으로 이름을 얻을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맥(人脈)으로 다져진 조직의 틀속에 들어가 위계질서에 순응해야한다. 특히 그가 나온 미대는 국내 화단에서 수적으로 우세했고 조직도 막강했다. 그 조직의 리더는 전광영에게 자신의 인맥에 가담할 것을 제안했으나 그는 몇가지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이것이 그를 화의 이방인으로 내몰고 처절한 고독과 좌절을 겪게 할 줄은 그도 미처 몰랐다.

뉴욕의 이스트빌리지에는 저마다 성공을 꿈꾸는 세계의 예술가들이 몰려든다. 그들은 가난과 싸우며 혼신을 다해 작업에 몰두하지만 이름을 알리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한 주일에 수십명의 화가들이 전시회를 열지만 그들 중에 과연 ‘이름’을 얻고 ‘작품성’을 평가받는 기회란 가뭄의 콩나기에 불과하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도 무명시절 그곳에서 작업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아무리 열심히 하고 새로운 작업을 발표해도 뉴욕타임스나 평론가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면 물거품이 되고 만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서울도 마찬가지다. 수천명의 화가가 있고 해마다 미대를 졸업한 신인들이 몇백명씩 배출된다. 개인전과 그룹전이 쉴새 없이 열리지만 인기도 있고 작품도 팔리는 유명작가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몇 년간 땀흘려 작업한 작품을, 어렵게 적립한 돈을 전시비용에 털어넣어 작품전을 열어도 매스컴의 집중조명을 받지 못하면 일과성 행사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여기에 한국사회의 특수성이란 또 하나의 벽을 넘지 않으면 안된다. 어느 사회나 파벌과 계층이 있게 마련이지만 한국의 경우는 학연이나 인맥이 작품성에 우선할 때가 적지않은 것이 문제로 지적되어 왔다. 경쟁에서 이기려다 보니 화단에서도 정치와 처세술이 난무해 누가 밀어주느냐, 누구의 줄에 서느냐가 성패를 좌우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런 한국풍토에서 전광영은 조직과 인맥을 거부했으니 화단의 중심에 들지못하고 아웃사이더가 될 수 밖에 없었다. 학연과 인맥으로 뭉친 이너서클에 들 기회가 있었지만 피라미드식 조직과 비 민주적인 운영에 회의를 느낀 그는 스스로 화단 밖으로 뛰쳐나갔다. 외토리의 소외감은 극복키 힘들만큼 고통스러웠다. 그 고통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그림을 그리는 것 뿐이었다. 그는 두문불출하고 작업에만 몰두했다.

전광영은 78년부터 90년까지 한해도 거르지 않고 개인전을 열었다. 68년 이후 20회가 넘는 작품전을 가졌다니 그 작업에 쏟은 땀과 열정이 얼마나 혹독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만 하다. 그가 이처럼 작품발표에 신경을 모은 것은 기성화단에서 외면하는 자신의 작업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받기 위해서 였다고 훗날 그는 필자에게 털어놓았다. 그런데도 무수한 화상이나 매스컴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추상 작품이다 보니 팔리지도 않았다. 그는 미술학원 운영으로 생활을 꾸렸지만 심적 고통이 그를 더 괴롭혔다. 그 흔한 그룹전 초대전에 끼이지 못한 것은 물론 미술인 인명사전에 조차 당시 그의 이름은 빠져 있었으니 가족들 볼 면목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자신의 처지때문인지 전광영은 필자와도 거리를 두었다. 매년 팜플렛을 보내기는 했지만 전화통화나 만남은 애써 파하는 눈치였다. 필자 역시 전광영이라는 존재를 차츰 잊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불쑥 필자를 찾아왔다. 조선일보를 떠나 새로 창간한 ‘스포츠조선’ 문화부장으로 재직하던 92년 5월 어느날이었다. 당시 필자는 칸국제영화제 취재를 떠나려던 참이었는데 그가 22회 개인전 팜플렛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반갑기도 했지만 내심 화가 치밀었다. 뭐가 어때서? 학벌이 부족해서? 노력이 부족해서? 작품성이 없어서? 그를 지켜보아온 필자로서는 이런 의문들이 북받쳤다. 조직에 가담하지 않고 인맥에 매달리지 않았다고 하여 그룹전에도 끼이지 못하는 화단 풍토만를 이대로 방치해도 되는 것인가. 자유직업인인 화가가 인맥을 이탈했다고 언제까지 불이익을 당해야 할까. 그런 소외된 상태에서 작품으로 승부하고 객관적 평가를 얻기 위해 발버둥쳐온 전광영을 “세상 사는 재주가 없는 사람”으로 몰아세울 것이다. 한 작가가 작업에만 매달려 20여년간 20여 차례 개인전을 였었는데도 화단의 중심에 들기는커녕 이름조차 알리지 못했다면 그런 미술계 구조를 정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가적인 역량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작품 외적인 것들로 작가를 함몰 시킨다는 것은 분명 부조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필자의 흥분에 그는 오히려 결연한 의지를 눈빛에 발했다. 어떤 난관이 앞을 가로막더라도 기필코 인정받는 작가가 되겠다는 각오가 엿보였다. 그가 건네준 22회 개인전 팜플렛에 실린 작품들은 이미 어두움을 떨쳐버리고 희망과 자신감이 넘치는 밝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작품의 주제는 초창기부터 일관되게 추구해온 ‘빛’이지만 전시할 신작들은 작업방식이나 색채의 변주에서 전보다 한층 깊이 있고 자유분방해진 특징들을 보여주었다. 작품의 명제 역시 종래의 ‘선(線)과 공간개념’에서 ‘코발트의 정(情)’으로 바꿨을만큼 코발트색을 위주로 한 ‘빛의 아라베스크’를 연출해냈다. 또한 은하계나 심해(深海)같은 차갑고도 역동적인 에너지를 분출시키는 작품들도 발표했다. 작가는 “인간과 삶의 의미를 화면 전체에 농축시키려고 했다”는 설명도 잊지 않았다.

작가와 헤어진 후 필자는 어떻게 하면 전광영이라는 화가를 세상에 알릴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22회 개인전 리뷰를 아무리 잘해도 또다시 세인의 관심 밖으로 묻힐 것 같았다. 더욱이 스포츠신문은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기에 더욱 난감했다. 출장일은 다가오는데 방법은 막막했다. 팜플렛을 덮고 눈을 감았다. 그때 뭔가가 불현듯 머리를 스쳐갔다. 정상적인 방식으로 이 작가를 알려서는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렇다. 역량과 에너지가 충만한 이 작가를 부각시키려면 전광영이라는 화가가 계속 묻혀버리는 화단의 구조적 병폐를 파헤쳐야한다고 마음먹었다 그러자면 신문기자의 상도를 벗어날 수 밖에 없었다.

제목은 ‘화단의 이방인 전광영’으로 뽑았다. 학연과 인맥을 뿌리친 한 작가가 20여년동안 얼마나 소외를 당했으며, 또 얼마나 고독한 작업을 해왔는가에 초점을 맞췄다. 20여년간 우직하게 작업에 매진해온 그가 학연 인맥을 등졌다하여 화단에서 밀려나 언제까지 무명으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필자의 안타까운 심정을 기사화한 것이다. 작품만 열심히 해서는 인정받기 어려운 화단의 풍토와 보이지 않는 부조리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기사의 마지막은 이렇게 마무리했다.
‘전광영의 이번 22회전은 한 개인의 작업성과에 그치지 않고 부조리가 팽배해진 국내화단에 시사하는 점이 크다.”
칸영화제를 다녀와 작가와 자리를 함께 했다. 필자가 직접 쓴 기사가 자신은 물론 가족들의 가슴까지 적셨다고 그는 술회했다. 한때 화단을 떠날까도 생각했었는데 이 기사에 용기를 얻어 새로운 작업에 도전하겠다는 내심을 털어놓기도 했다. 필자는 개성만 살리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그에게 불어넣었다. 그날 우리는 모처럼 대취했다. 그 다음해 필자는 조선일보 문화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눈코뜰새 없는 업무 때문에 그의 근황을 접할 수 없었다. 그런 어느날 그가 불쑥 신문사 편집국에 들어섰다. 전화를 건후 만난 일은 있어도 직접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좀 멋적어하긴 했지만 표정은 전과 달리 밝고 자신감에 넘쳐 보였다. 인터뷰룸으로 옮겨 그가 내민 전시회 캐털로그는 눈을 번쩍 뜨개했다. 첫째는 그간 대관전만 해오던 그가 상업화랑의 초대를 받은 것이 놀라웠고, 둘째는 3년전에 보았던 평면작업과는 달리 종이에 의한 오브제를 시도한 변신이 놀라웠다. 무엇보다 그가 화가로서의 생기를 되찾은데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고사성어처럼 뒤늦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는 점이 필자를 기쁘게 했다. 담당 기자에게 인터뷰를 맡길 수도 있었으나 작가의 새 작업이 펼칠 무한한 가능성을 확신한 당사자로서 직접 기사화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는 아마도 최초로 그의 새 방법론을 언론에 털어놓았을 것이다.

“어릴 때 고향(강원도 홍천) 한약방에서 보았던 약봉지가 인상깊게 남아 있었어요. 한지로 싼 약봉지를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풍경이야말로 그것 자체가 한국의 현대적 오브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양이 박스문화하면 우리는 보자기문화라고 할 수 있는데, 그걸 현대화 시켜본 작업입니다.”
작가가 20여년간 해오던 캔버스작업을 버리고 재료와 방법론을 한꺼번에 바꾸기란 쉽지않은 용단이다. 그런데 전광영은 고심 끝에 종이(한지)를 발견했고, 스티로폼을 종이에 싸고 묶는 이색기법을 찾아냈다. 스티로폼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 삼각도형을 만든 후 이를 일일이 한지로 싸고 종이를 꼰 끈으로 묶어 화판 위에 차곡차곡 부착하거나 모자이크하는 입체적인 부조화(浮調畵)를 창안한 것이다. 그때까지 오리지널을 보지 못한 필자는 비록 캐털로그로 접한 작품만으로도 그의 방법이 독창적이고 개성도 있을 뿐 아니라 국제성도 띨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이런 작가를 발굴하여 초대전을 열고 해외 미술시장 진출의 길을 모색한 박영덕 화랑 박영덕 대표의 혜안이 없었던들 전광영이란 작가의 ‘화려한 2기’는 출발이 늦어졌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20여년간 외톨이가 되어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전광영은 화랑 초대전과 해외시장 진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은 셈이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20여년간의 외로운 작업이 결과적으로 큰 힘이 됐다”며 “우리의 언어와 감각, 한국적인 정서와 방법론을 국제무대에 전하고 평가받을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 기쁘다”고 말했다. 전광영 작품전은 ‘독창적 한지이용…신선한 시각체험”이란 제하로 95년 6월 16일자 조선일보 문화면 톱을 장식했다. 당시 한 작가의 작품전을 작품사진에 인물사진까지 곁들여, 그것도 데스크가 직접 기명으로 싣는다는 것은 파격이었다. 일부에서 특혜라해도 변명할 말은 없지만 한 작가의 과감한 변신은 조명할 가치가 있다는 소신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예정대로 그의 작품은 박영덕화랑에 의해 95년 7월 ‘LA 인터내션널’에 진출한 후 국제무대에 주목받기 시작했다. 98년 시카고 아트페어에 출품해 매진기록을 세운 그는 99년 뉴욕 첼시의 신흥화랑 킴포스터 갤러리 초대전에서도 출품작 19점이 솔드아웃된 데다 파격적인 조건으로 전속계약을 맺었다. 미국까지 작품운송료는 물론 통관료, 캐털로그 제작등 경비일체를 부담하고 전세계로 작품을 홍보해준다는 조건이었으니 그의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방인’ ‘외톨이’란 수식어가 붙어다니던 작가가 마침내 세계 무대에 올랐고 ‘인기작가’의 반열에 끼었다는 것은 ‘인간승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시카고, 마이애미와 독일의 쾰른, 스위스 바젤등 세계5대 아트페어에 연속 참가하는 기록도 세워나갔다. 어느새 그의 이름 앞에는 ‘해외에서 더 인정받는 작가’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가 세계 미술시장에서 해외 콜렉터들의 관심을 끄는 첫째 요인은 독창적 발상에 있다고 본다. 근래 종이작업은 동서를 막론하고 붐을 이뤘지만 개성을 살리기란 쉽지 않았다. 전광영은 고서나 색지로 스티로폼을 싸서 붙여나가는 그만의 기법으로 독창성을 추구했다. 같은 매체라도 방법론에 따라서 변용이 가능함을 보여준 것이다. 창의력이 필수인 현대에서 그는 주제와 접근방법, 표현방식에서 ‘섬싱 뉴(Something New)’를 시도함으로써 평면과 입체의 벽을 허물었다는 평가를 받을만 하다. 발상이 아무리 새롭다해도 관객의 시각과 마음을 끌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그런데 전광영의 종이부조작품은 보는 이에게 신선한 시각적 체험을 안겨준다. 종이 특유의 질감과 색채에 따라 다양한 뉘앙스를 연출해내기 때문이다. 특히 한지가 뿜어내는 소박한 정서가 현대적인 조형성과 어우러져 은은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여기 입체적인 돌기들을 군집(群集)시키면 역동적인 에너지를 분출하고, 조명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양감을 연출하는 것도 특징이다. 당시 평론가 오광수씨(현 국립현대미술관장)는 “종이의 속성에 자신의 상상력을 부과해 시공을 넘어서는 정서의 공감대를 형성한다”고 평했다. 결국 한국의 전통적 소재를 동양의 기법을 응용하여 현대감각에 맞게 조형화시키므로써 세계성을 획득한 것이다.

전광영은 국립현대미술관의 ‘2001년 올해의 작가’에 선정됨으로써 마침내 국내화단에서 인정을 받고 ‘이방인’의 딱지도 떼어버렸다. 앞서도 언급했듯 조직과 인맥의 벽이 두터운 한국화단에서 ‘외톨이 작가’가 ‘미술관 작가’로 픽업되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나 해외에서 평가를 받고 애호가들에게 인기있는 작가가 국내화단에서 오히려 뒤늦게 조명을 받았다는 것은 솔직히 부끄러운 일면도 없지 않다.
‘올해의 작가’는 국립현대미술관이 95년부터 시행한 초대전으로, 전수천, 윤정섭, 황인기, 권영우, 김호석, 노상균, 이영배에 이어 일곱번째로 전광영이 선정됐다.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에 크게 기여했거나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준 작가, 향후 한국미술의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할 수 있는 작가로 지목된 것이다. 아울러 대형공간에 작가의 작업을 집중 전시함으로써 성과와 가능성을 평가받는 기회이기도 하다. 불과 10여년전만 해도 붓을 꺽으려 했던 전광영이 여기에 초대되기까지는 피나는 노력과 함께 불굴의 의지가 뒷받침되었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그의 지난 세월들은 험하고 외로웠을 터이지만 그래도 필자를 비롯해 그의 역량과 창의력을 믿는 후원자들이 많았기에 그는 결코 좌절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현대미술관의 몇 개 전시관을 채운 전광영의 대작들과 종이설치작품을 대하면서 필자가 남다른 감회에 젖은 것도 작가의 어제와 오늘이 대비되기 때문이다. 이번 초대전을 위해 전광영은 속된 말로 화단에 뭔가 보여주기 위해 혼신을 다했다. 그런 오기들이 전시장 곳곳에서 배어나오기도 하지만, 이번 전시를 계기로 전광영의 작품은 다각도로 분석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그를 따라다니던 ‘이방인’이니 ‘아트페어작가’니 하는 별칭도 떼어버리고 종이부조와 입체, 설치까지 영역을 넓히고 조명 또는 음향과의 융합도 시도해 볼 수 있도록 그를 리드하는 평론이 나왔으면 한다. 작가 역시 “이제는 됐다”보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정력을 쏟아주기를 바라고 싶다. 예술에 있어서 자만과 불욕은 경계대상임을 작가 자신이 모르지 않겠지만, 이제는 마음을 비우고 끊임없이 창작의지를 불태우고 새로운 시도를 해야만 일가를 이룰 수 있음을 가슴에 새겨야 할 줄 믿는다. 전광영의 과거에 필자가 미약한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다. 그런 필자의 기대가 미래에도 이어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01올해의 작가展 도록 중, 국립현대미술관,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