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의 시간과 공간의 은밀한 대화
유재길(미술평론가, 홍익대 교수)

전광영의 부조 회화 작품은 사각 평면에 무한의 시간과 공간을 담고 있다. 이들의 은밀한 대화는 신비롭다. 그의 작업은 무엇보다 사색의 시간과 확장된 공간 표현이 돋보인다. 그 속에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만남을 자연스럽게 발견하게 되면서 이들의 대화를 엿듣는다. 겉으로 드러난 부조 작품의 외형은 단순하다. 흰색과 회색, 황색, 옆은 검정색 반점으로 가득찬 무채색의 평면부조이다. 즉, 평면이면서 작은 삼각형, 사각형 입방체들이 빽백이 가득 찬 부조 회화이다. 개개의 형태들은 소박하며, 보다 단순하다. 화면은 요란스럽지 않은 작은 면들과 작은 반점들로 가득찬다. 화려한 색채도 없다. 무채색의 화면에 작은 면들이 엄격한 기하학적 구조물처럼 긴밀하게 짜여 있는 느낌이다. 우리 고유의 종이(한지)를 사용한 표면은 매우 부드럽다. 서정적 분위기이다. 근작에서 더욱 돋보이는 무한의 시간과 공간 여행을 그의 <집합(aggregation)>연작을 통해 체험하고자 한다.

1997년에 제작된 전광영의 <집함>연작에서 우리는 더욱 무한의 시간과 공간의 은밀한 대화를 엿듣게 된다. 대화의 신비를 생각하면서 먼저 그의 작품에 나타난 시간의 흔적을 생각해 보자. <집합>연작은 물리적 개체의 집합이면서 동시에 시간의 함축을 의미한다. 이 같은 시간개념은 ‘개체의 실족’을 나타낸다. 한지에 둘러쌓인 개개의 덩어리들은 실존적 개체의 흔적들이다. 즉, 퇴색된 종이의 질감과 색채에서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쉽게 확인되는 것과 작은 반점처럼 보이는 흑색의 글자들, 익명의 편지처럼 우리는 개개인의 체험과 역사를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그의 화면에 구상적 형상으로 서술적 시간 기록들을 발견하기 힘들다고 해도 이와 같은 시간의 흔적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시간의 흔적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의 작품에 나타난 시간개념 확인은 <집합>연작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먼저 개체의 고정된 모습은 우리 시대에서 ‘실존’이나 ‘존재’로 확인된다. 작은 입방체의 개체들, 이는 익명의 존재들이다. 이 같은 흔적들은 평면에 고착되어 움직이지 않고 있다. 죽은 듯한 정지된 개체의 모습이 애처럽기도 하다. 그러나 정적이며 속도감이 없다고 해도 개체는 절망과 연결되지는 않는다. 미묘한 변화가 각자의 내면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겉으로 보이지 않으나 분명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다. 그 속에서 시간은 정지되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 개개의 존재도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침묵 속에 시간의 흠과 신비로운 존재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감탄하게 된다.

<집합>의 조형적 특성은 부조의 공간이다. 사실 그의 작품에서 시간개념보다 더 강조되고 있는 것이 바로 입체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평면에 고착된 작은 개체는 부조로 일루젼에서 벗어난 실제 공간성을 갖는다. 개개의 작은 독립된 부조물들은 긴장감을 주는 배열로 환상적 공간을 탄생시키고 있다. 여기에서 평면은 실제 공간과 가장적 공간이 결합된다. 실제 공간은 삼각형이나 사각형 입방체들로 구축되어 3차원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 또한 빈틈없이 빽빽이 짜여진 실제 공간은 무한의 시간을 담고 있으며, 과거의 흔적들을 끝없이 펼쳐 보여주고 있다.

한편 실제 3차원의 공간과 달리 화면은 상상적 공간이 만들어지면서 신비롭게 느껴진다. 이는 물리적 공간에서 벗어난 정신적 공간이다. 이는 서양의 원근법 공간과 동양의 여백과 같은 조형적 표현으로 그의 작품에 중요한 조형적 특성이다. 작은 입방체의 반복에 의해 만들어진 정신적 공간은 무엇보다 자신을 나타내는 자기-지시적(self-referential)형상이다. 작은 개체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 전면화(all over) 구성으로 자기 지식적 형상이 뚜렷해진다. 때로 좌우상하 초점을 분산시키는 다양한 구성의 변화로 시각적 환영의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그러나 그의 전면화 구성은 새로운 시각 체험과 함께 정신적 공간을 모색하는 것이 우선으로 생각된다.

무한의 시간과 공간의 은밀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1997년에 제작된 <집합 97>연작의 양식적 특성을 중심으로 구체적 예를 살펴보자. 근작의 작품 크기는 소품서부터 폭이 2m나 되는 대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집합 97>의 양식을 크게 구분한다면 3-4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화면 가득 동일한 크기의 입방체들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평면성을 강조한 전면화(all over)와 부조로 제작한 전면화의 입체성이 강조된 두 가지 작업을 병행했다. 이러한 작품은 마치 무한대의 공간을 연상시키는 점묘 추상화처럼 보인다.
둘째는 기하학적 화면분할로 입체적 실제 공간과 평면적 공간이라는 이분화된 구조를 갖는 작업이다. 이 작품에서는 무엇보다 기하학적 질서의 조형미가 돋보이는 이성과 이에 반하는 감성적 표현으로 정신적 공간 탄생이 주목되었던 것이다.
셋째는 입체적 형태와 평면적 형태의 경계선이 없는 작업이다. 이 같은 유형의 화면구성은 특히 변화가 많다. 중심을 평면으로 처리하면서 가장자리는 입체적 입방체로 만들기도 하거나 그 반대의 조형적 변화가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작은 개체들의 다양한 표정들이 살아나면서 전체 화면은 긴장감을 주면서 보는 사람들에게 신비로운 공간체험을 하게 한다.

이상 전광영의 근작에 나타난 무한의 시간과 공간의 은밀한 대화에서 무엇보다 우리가 공감하는 것은 자기 지시적 ‘개체’의 의미와 독특한 조형적 표현이다. 작가는 ‘실존의 개체’를 가장 개성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어는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작품들이다. 한지로 만든 작은 입방체들을 화면 가득 채워나가는 작업은 베틀을 짜나가는 것과 같다. 많은 시간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여기에 작가는 자신만의 독자적 조형언어를 창조해 우리의 공감을 얻어내고 있다.

가장 개성적 표현인 개체의 형태는 시간과 공간의 대화를 통해 진정한 현대인의 존재를 모색한다. 동시에 3차원의 물리적 공간과 여백의 정신적 공간을 통해 독창적 ‘시각적 환영’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여기서 어떠한 설명도 없다. 서정성으로 가득찬 부조 화면을 보여주면서 감상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본질적으로 그의 작품은 감각을 바탕으로 구축된 서정적 추상화이다. 부조 공간은 기호화된 개체들로 완벽한 추상적 표현이다. 이것은 개념이나 미적 이론을 위한 작업이 아니다. 직감에 의한 감각적 표현과 감성이 우선이다. 작가에게는 어떠한 이론보다 감각적 작업행위가 중요하다. 동시에 어려운 작업과정을 소화시킬 수 있는 인내와 끈기가 요구되고 있다. 수도승과 같은 오랜 제작과정에서 <집합>의 신비로운 조화가 탄생되는 것이다.

신비로운 조화를 느끼게 하는 전광영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감상자는 무언가 환상에 빠져든다. 전혀 예기치 못한 시각적 환영(optical illusion)의 체험이다. 이는 초현실주의에서 말하는 무의식의 환상과 다르다. 그의 작품은 매우 현실적 시간을 담고 있으면서도 과거와 미래를 여행한다. 동시에 평면에서 3차원의 공간을 구축하여 열린 공간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무한의 시간과 열린 공간의 은밀한 대화의 장에서 우리는 이들을 보게된다.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우리의 전통 미의식을 새롭게 해석한 조형적 표현에 깊은 공감과 무한의 시간과 공간 예술세계를 발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