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 웨슬만 (Tom Wesselmann) 1931-2004


'있는 그대로 말하기'

탐 웨슬만의 작품에 있는 모든 것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있는 그대로이다. 그는 다름 팝아트 동료들보다 훨씬 폭넓게 1960년에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있는 그대로 말’하려 해왔다. 1964년에 프랭크 스텔라가 자신의 추상회화에 대해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이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한 말은 웨슬만의 작품에 대해서도 진실 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삼십년 이상 주석가들이 붙여놓은 해석들 또 한 매우 명징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이미지-성적으로 자극적인 여인들과, 음식 또는 제조된 상품 이미지들-가 역설하는 바에 따라 그의 예술이 갖는 역할에 대해 사회적 내용이나 소비사회에 대한 비평의 한 형식이라는 가정을 내려 버리기 쉽다.

웨슬만은 주제에 따라 자신의 예술을 그와 같이 해석하는 것, 주어진 작품 안에서 이미지들이 갖는 순수하게 시각적인 기능을 무시한 채 그들의 문학적인 의미만을 보는 것에 대해 특히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나 그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특수한 종류의 모티브들에 대해 강한 집착을 보여왔다는 사실 자체는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의미는 우리가 믿고 싶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명한 것일 수 있다. 어떤 면으로 그들은 모두, 우리가 매력적이라고 여기는 어떤 사람의 얼굴이나 육체를 보거나 만질 때, 또는 뜨거운 태양 아래 해변에서 먹고 마시고 꽃향기를 맡거나 음악을 듣거나 빈둥거리고 있을 때 경험하게 되는 고조된 쾌락의 상태들에 대한 증거일 수 있다.

거의 예외 없이 웨슬만의 이미지들은 우리 안에서 쾌락의 원리에 호소하며, 특정한 모양, 질감, 색채들의 결합에 의해 보다 육체적인 수준에서 발산되는 쾌락의 감각에 기여한다. 모티브의 선택은 작가가 포화 지점까지 다다른 욕망의 감각들을 전달하기 위한 공식의 한 부분일 뿐이다. 작가처럼 우리도 비흡연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담배가 보다 영양가 있는 청량음료가 제공하는 구순 만족감보다 더 예민한 구순 만족의 한 형식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그의 초기작품에 나타나는 실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나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프로그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원칙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발견할 때까지 채널을 바꿀 자유가 있다. 마티스, 르느와르, 반 고흐, 모딜리아니 그리고 다른 작가들의 예술작품들의 전망 좋은 풍경이나 복제품들은 우리 나름의 취향에 맞을 수도 있지만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러한 세계관들 각각이 이 세계가 제공하는 것을 미적으로 감상하는 하나의 방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1993년 초 웨슬만은, 아마 아무도 그의 말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지만, 과거에 여러번 이런 사실을 지적했었노라고 나에게 말했다. 자신의 대표적인 스타일은 주제에 특별히 연관시킨 결과 개발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1950년대 후반 뉴욕에서 학생일 때 좋아하게 되었던 미국 추상표현주의 회화의 영향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하나의 방법으로 일부러 매우 관습적인 예술의 범주들에서 작업할 것을 선택함으로써 개발된 것이라고 밝혔다. 만약 그가 큰 캔버스에 격렬한 몸짓으로 물감을 바르는 것으로 유명한 윌렘 드 쿠닝과 잭슨 폴록 같은 화가들을 계속 흉내냈더라면, 그는 아마 다른 사람들처럼 거장들의 그늘에 가린 추종자의 한사람 쯤으로 인식되는 운명에 처했을 것이다. 그의 존재를 느끼도록 만들기 위해, 그는 유사한 힘을 가졌으나 완전히 다른 전제를 깔고 있는 작품을 창조하는 또 다른 길을 발견해야만 했다. 비록 이것이 그가 현대미술에 대해 품게 되었던 모든 전제들을 전복시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1959년 내가 추상화가나 재현화가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때, 나는 어떤 특별한 주제나 방향뿐만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해서도 아무런 열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는 완전한 제로 상태에서 출발하였다. 나는 단지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의 정반대를 행함으로써 시작했다. 그리고 재현적인 회화를 선택하면서, 나는 미술사를 주제로 삼기로 결심했다. 나는 누드, 정물, 풍경, 실내풍경, 초상 등등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나는 적극적인 관심사들을 따라가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누드와 정물이었다. 나는 초상화는 사실 손도 대지 않았다. 풍경화의 경우, 나는 오랜 시간 걸려 그것에 우회적으로 도달했다. 초기의 것들은 자동차 광고간판의 부분을 사용하는데 대한 변명일 뿐이었다. 나는 실내풍경이 약간 새로운 범주 같다고 느꼈다. 그것은 실내풍경이었으나, 너무나 특이하게 실제적인 요소들과 조합되어 있기 때문에 무언가 다른 것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그것들을 실내풍경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그저 그림을 그릴 뿐이다.”

“나는 그들을 「위대한 미국 누드#1」, 「정물#1」등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나는 이 작품들에 매우 문학적인 그래서 작품에 온갖 종류의 해석이나 농담이나 다른 어떤 것들을 붙이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제목으로 그들에 비범성이라는 불을 부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군더더기를 벗겨내어 숫자로 제목을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시각 예술의 문학적 해석에 대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웨슬만은 1960~61년 헬리밀러의 <북회귀선>과 <남회귀선>-당시 성에 대한 솔직성 때문에 매우 논란거리로 여겨졌던 소설들-대한 해석을 통해서 자신의 성적 관점을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하도록 격려받았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관심들이 가장 솔직하게 표현된 연작들의 제목으로 고안된 「위대한 미국 누드」는 위대한 미국적 꿈뿐만 아니라 작가들이 종종 선망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하는 위대한 미국 소설의 뉘앙스를 풍긴다. 그와 같이 힘있고 야심적인 문구의 선택에서 보이는 자기비하적인 유머는 그러나 또한 그가 다루고 있는 소재가 갖는 극히 개인적인 성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유용한 방법의 하나였다. 대학시절 만났던 도트 아이리쉬라는 여자와의 7년간의 결혼이 막 무너지고 혼자만의 외로운 시기를 지낸 후 그는 1957년 만난 제자인 클레어 셀리와 사귀기 시작했다. 그들을 그가 부인을 떠난 후인 1959년 여름부터 서로 만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여자친구였고 1963년에는 그의 부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주요한 모델이기도 했다.

웨슬만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 새로운 관계에서 발견해낸 성적이고 감성적인 성취감을 축복하기로 결심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의 세대 화가들이 특수한 존재 또는 고통 받는 영혼이라는 낭만적인 예술가관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던 시기에 감정을 민감하고 감성적으로 열려있게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그가 자신의 예술에서 그와 같이 내밀하고 사적인 문제들을 다루면서도 미국추상표현주의의 과도한 주관성을 전복시킬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까? 그 딜레마는 그가 이미지가 나타나는 꼴라쥬를 만든 직후 정신분석을 경험함으로써 깊어졌음에 틀림없다. 1960년부터 정신분석의 경험은 그의 삶과 예술에 영향을 끼쳐온 강력한 충동들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평균 일주일에 네 번 가진 면담에서 그는 그의 꿈에 나타난 성적인 내용을 검토해 보도록 요청받았다.

“내가 학생이었을 때 나의 감성적 힘은 너무 약했는데, 특히 삶에서 깊은 변화를 겪고 있었을 때여서 그랬다. 나는 모든 것을 팽개치고 화가가 되려고 노력했다. 나는 아침 일찍 한번이나 두 번 회화반에 가서 붓을 들고 큰 획을 긋곤 했다. 그것이 그날 그림의 마지막이었다. 나는 감성적으로 너무 약해서 계속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당시 매우 건강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신분석이 나를 건강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내가 해야한다고 마음만 먹으면 일주일에 7일 동안 하루종일 그림을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나를 강인하게 만들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내가 실제로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감성적 차원으로부터 도피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매우 복잡한 이슈이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지성적으로 그리고 분석적으로 내가 전에 하지 않았던 수많은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웨슬만이 그의 성인 생활을 통틀어 주요한 사건들을 다루는 한 방법으로서 의존하였던 정신분석은 그렇게 그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만큼 강하게 만들었다. 자기 자신을 너무 잘 이해하고 있다는 두려움은 그의 창조력을 파괴할 수 도 있었다. 그에겐 그림이 삶의 환경을 반영하는 것이 적당하지 않아 보였다. 그러므로 예술적 전통의 연장선상으로부터 동떨어진 방법으로 누드를 제시하는 것이 유용했다. 에로티시즘은 캘리포니아의 멜 라모스와 영국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알렝 존스 같은 팝아트 예술가들에게 그랬듯이, 우리가 관객으로서 예술작품을 대면했을 때 경험하는 일반적인 침묵의 의표를 찌르는 강력한 수단을 제공했다. 그와 같은 이미지들을 무관심하게 또는 예술작품을 볼 때 그렇게 하도록 훈련받아온 대로 그들을 존경스럽게 대하기는 어렵다. 그들을 지적으로 쉽게 설명해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점이 무엇이든지간에 우리는 그들을 처음 볼 때 하나하나에 우리 자신의 연상과 개성을 부여하면서 거의 자동적으로 반응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개인적 문제를 처리하는 웨슬만의 해결책은 직선적인 대중적 진술의 근거로서 여자친구의 육체적 제스츄어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포우즈와 제스츄어를 모방하는 대신, 나는 포우즈를 우리의 성적 내밀성과 매력의 메타포로 만들었다. 그들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성을 나타낸다.” 그가 지적한대로 몇몇 자세의 성적 자유분방함은 1953년에 첫호가 발행된 플fp이보이 같은 잡지나 캘린더에서 당시 회자되던 포르노와 핀업 이미지의 그것을 휠씬 능가하고 있다. 흥분된 기대감으로 단단해진 유두와 면도한 음부를 드러내면서 순순히 받아들일 태세로 다리를 벌리고 있는 이 여인들에겐 부끄러움과 정숙함이 없다. 1960년대 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아직 검열이 강했다는 사실과 그와 같이 과감한 자세는 몇 년 후 진한 포르노에서만 통용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해볼 때 이러한 이미지들이 갖는 대결적 성격은 무시될 수 없다. 1970년대 초 이후 페미니스트 운동의 자각 속에서, 그들은 몇몇 평론가들에 의해서 남성의 성적 욕망의 단순한 대상으로 여성을 대상화한 기호들로 재해석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그들은 명백하게 1960년대에 관심을 갖게 된 성적인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솔직성과 정직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었다.

1959~61년의 작은 꼴라쥬들에서 이미 명백하게 드러났던 억제된 에로티시즘은 웨슬만이 1961년 훨씬 큰 스케일로 작업하면서 확대되었고 결국 훨씬 더 의식적인 특질이 되었다.

첫 번째 대형 캔버스작인 「위대한 미국 누드#1」은 매혹적이지만 오히려 도발적인 자세의 인물을 보여준다. 그녀는 단순히 벌거벗은 채 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누워있는 자세는 막 낮잠을 자려는 사람처럼 상당히 노곤하다. 웨슬만이 그린 이 초기 인물들의 섹시함은 주로 감미롭게 굴곡진 형태와 윤기 있는 색채, 즉 본질적으로 추상적인 특성들에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이 그림들에 나타난 성의 실제라기보다는 그것의 이상을 따르고 있다.

“나는 처음부터 얼굴을 그려 넣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그림이 일종의 행동을 갖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너무 디테일이 많으면 그것이 둔해질 수 있다. 얼굴은 누드를 초상누드화처럼 만듦으로써 작품 전체의 느낌을 변화시키므로 나는 처음부터 얼굴을 사용하지 않았다”

「위대한 미국 누드#12」는 이러한 그림들 중 가장 도식적으로 다루어진 작품 중 하나인데, 그것은 웨슬만의 후기 작품들에 고도의 에로티시즘 감각을 부여해 주는 입술과 가슴과 음부로 집중되어 있다. 이 그림을 위해 포우즈를 취해주었던 모델 주디는 그녀의 이미지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아마도 입술이 있는 곳이라고 추정되는데, 키스하고 싶다고 느낄 정도로 그 그림이 매우 좋다고 했다. 이 우연한 말에서 힌트를 얻어, 작가는 입술사진 한 쌍을 꼴라쥬함으로써-「위대한 미국 누드#27」(1962)에서 처럼-그리고 나중에는 그들을 물감으로 묘사함으로써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표정이 없을 뻔했던 얼굴들에 사실적으로 묘사된 입술을 결합시키기 시작하였다. 거대한 스케일로 확대된 누드의 초기 예인「위대한 누드#53」(1962)에서 선정적인 기대감 같은 것으로 벌어져 있는 입술을 가진 확대된 입은 완전하게 대칭적인 핑크색 젖꼭지와 쌍을 이루고 있다. 이 꼴라쥬된 입술은 사실 청량음료를 마실 생각에 즐겁게 웃고 있는 여인을 보여주고 있는 로얄 크라운 콜라의 광고판에서 오려낸 것이었으나, 새로운 컨텍스트 안에서 나타나는 즐거움은 보다 순수하게 감각적인 차원을 띠고 있다.

다른 작품들이「해변풍경#19」(1967)처럼 가슴의 형태로만 표현되고 있는 반면, 웨슬만의 악명 높은 여인들 중 몇몇, 예를 들면 「흡연자들」이라는 변형 캔버스 작품이 입술만으로 마무리되고 있는 것은 이미 정해진 결론처럼 보인다. 욕실 그림 연작에서 정물의 부분들은 극단적으로 클로우즈 업 되어 있는 신체의 부분들과 함께 과감하게 확대되어 있다. 1968~70년의 「침실 젖꼭지 상자」연작의 조각적 재현은 이런 류 중 가장 악명 높은 작품일 것이다. 그것은 뉴욕의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 벽에 부착되었으며, 젊은 모델이 발가벗은 가슴을 상자 위로 떨어뜨려 만든 실제의 파편을 그림과 나란히 전시하였다. 웨슬만이 「욕실 회화#39」(1978) 같은 작품들에서 클로우즈 업되어 보이는 여인의 얼굴에 나타난 온갖 표정들을 재현하기 시작했을 때조차-그가 인정하고 있듯이, 아마 부분적으로는 그가 사람 전체를 그려본 적이 없다는 비평에 대응해서-관심은 해방된 욕망이나 오르가즘적 만족의 기호로서 벌린 입에 계속 집중되고 있다.

“내가 크게 그리기 시작했을 때, 에로티시즘은 내 작품의 구성요소였다. 그것은 나머지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꼴라쥬의 일부이다. 그것은 작품의 핵심은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나의 작품은 항상 무엇인가 에로틱한 것을 만들어내는데 연루된 것이라기 보다는 보다 형식적이고 보다 구성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작단계에서 에로티시즘은 내 작품의 일부였다. 그것은 추상표현주의의 붓질이 그랬던 것처럼 내 작품의 일부였다. 그 당시 공공연하게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것은 ‘당신의 표정’에 나타나 있다. 나는 추상표현주의적 붓질을 더 이상 쓸 수 없었기 때문에-내가 그것을 버렸기 때문에-나는 그림을, 이미지를 공격적이게 만드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추상표현주의 회화가 언제나 전진하고 있으며 형태가 끊임없이 캔버스를 벗어나, 당신의 눈, 당신의 얼굴에 존재하고 있었듯이 에로티시즘은 나에게 있어서 그것을 성취하려고 하는 수단들 중 하나였다. 그당시 나는 사실 음모가 있는 것보다는 음모가 없는 음부를 그렸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에로티시즘이 약간 더 표정을 갖게 만드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빨간색, 사용하기에 강한 요소와 같았다. 내가 누드로 더 빠져들었을 때, 에로티시즘은 점점 관련이 없어지게 되었다. 나는 누드를 사실적이고 아마도 감각적이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비현실적이게 만들 것인가 하는 두가지 방향 중 하나를 선택 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사실적이고 감각적인 쪽으로 갔으며 그것은 누드를 다소 현실적인 크기를 유지하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실 초기 작품들 중 하나나 둘에서 여인은 식탁 위에 누워있다. 그렇게 그것을 인간적인 척도로 유지하자 그것은 좀더 감각적으로 되었다.‘

1961년 위대한 미국 누드들과 이들의 대형판들에서의 에로티시즘의 등장은 미국사회의 대표적인 기호들로 작용하는 이미지의 도입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는 곧 문화적 기표인 그러한 모티프들에 대해 어떠한 관심도 두지 않고 그들이 나타내는 생활방식을 찬미하거나 풍자하는 것도 거부하지만, 미국적 특성에 부여되어 있는 공격성은 성의 충격적인 명쾌함 만큼이나 공격적이다. 1960년대 초경, 웨슬만은 가능한한 명백하게 미국적인 이미지들을 선택하기로 결심한다. 편의상 이들은 종종 대중 매체들-잡지,광고,간판 그리고 그와 같은 것들-로부터 차용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그의 예술을 소비자 문화에 근거하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이것이 그의 꼴라쥬에 가장 유용한 재료였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평면 이미지들뿐만 아니라 실제 사물들을 결합하기 시작했을 때, 꼴라쥬로부터 아상블라쥬로 이동하는 과정에서도 이미 가까이에 있는 친숙한 사물들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예술 활동의 주류로부터 고립 분리되어 자기 나름의 작업개념에 익숙해진 후, 그는 다름 작가들이 유사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소비사회의 산물들을 아주 다른 이유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달가와하지 않았다. 1961년 12월, 텐스가에 있는 태내거 갤러리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할 무렵, 그는 레오 카스텔리 화랑의 이반 카프에게서 로이 리히텐슈타인과 제임스 로젠퀴스트의 작품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들이 카스텔리 화랑과 그린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을 때, 그들의 작품을 살펴보고 나서, 그는 그의 관점에서는 적어도 그들이 자신과 공통점이 거의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 안심하였다. 그 후 몇 달이 자나, 1962년 초 그가 앗상블라쥬에 주방기물들을 포함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옛 친구인 짐 다인이 비슷한 물건들을 작품에 붙이기 시작했다는 소리를 듣고 더욱 염려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다시 그들이 재료들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기뻐했다. 다인은 제조된 상품들의 인간형태적 특성을 강조했고 단순히 리얼리티에 대립하여 서있는 구성의 요소들이라기보다는 그들을 회화적인 배경과 극적으로 대비시켜 제시했기 때문에, 각각 걱정하지 않고 작품들을 계속해나갈 수 있었다.

웨슬만의 예술은 재빨리 새로운 운동인 팝아트의 일부로 승격되었다. 그가 매우 존경받던 뉴욕의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에서 열릴 국제적인 기획전, 『새로운 리얼리스트들』에 포함될 기회를 얻었을 때, 그는 거리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의 작품을 더 널리 알려줄 뿐만 아니라 예술로 먹고사는 것을 쉽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수락했다. 미학적인 전제에 있어서 논쟁점이 많고, 무모할 정도로 공격적이며, 유머러스하고 현대생활에서 쉽게 인식할 수 있는 매혹적인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으며 간혹 전통적인 감성에 충격을 주기도 했던 팝아트는 신문에서 즉각적으로 악평을 얻었으나 콜렉터와 일반 대중들로부터는 급속한 찬사를 받았다. 예술계의 늙은 수호자는 회의적이었으며 수년동안 그런 상태에 있었지만, 주요한 활동가로 평가받은 작가들의 명성은 공고해져 갔다. 반감을 가진 관중에게 추상미술을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느낀 저널리스트들은, 팝아트의 미학적 함의들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팝 이미지들에 이야기 거리가 많은 것에 만족하고 있는 수준에서, 그것에 대해 필요 이상의 것을 써나갔다. 당연히, 웨슬만은 너무 많은 관심이 주제와 노스텔지아에 대한 잠재성에 쏠린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으며 그는 그것이 도움이 되기보다는 위험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1963년 11월 1964년 2월 아트뉴스지에 실린 여덟 명의 팝아티스트들과의 인터뷰 중 하나에서 G.R. 스웬슨이 한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웨슬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는 일반적으로 꼬리표라는 것 그리고 특히 팝이라는 꼬리표를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용된 소재를 과도하게 강조하기 때문이다. 유사한 재료와 이미지들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상이한 방법들은 어떠한 종류의 집단적 의도도 거부하고 있다.” 그 운동으로부터 그리고 특히 소비이미지들의 역할에 대한 관중의 선입견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기 위해서, 1964년 이후 그는 고의적으로 상표에 대한 매우 공공연한 언급을 제거해 버렸다. 그는 반복해서 여성의 성적인 이미지가 포르노 잡지라는 대중매체에서 유래한다는 가정을 부인했다.「정물#46」(1964)같은 작품의 출발점이 된-밝은 색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가스주유소 형광판과 같은-상업간판의 개조 과정에서 조차, 그는 선택된 매체의 순수한 형식적 특성들로 관심을 고립시키기 위해, 설명에 있어서나 작품 자체를 위한 이미지의 선택에 있어서 두 가지 간의 연관을 무시했다. 이제 30년이 지나서야, 이 꼬리표에 대한 그의 반항이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자신을 구성원으로 삼는 어떤 클럽에도 가입하고 싶지 않았다고 주장한 유명한 미국 코메디언 그루소 막스처럼, 웨슬만은 자신이 논쟁의 여지없는 주창자 중 한사람인 운동의 반열에 받아들여지는 것을 거부하는 놀라운 결의를 보여주었다.

“나는 팝아티스트다”라고 오늘날 그는 인정한다. “하지만 내가 일부러 미국적 이미지를 선택했다는 한도 내에서이다. 간혹 나는 유럽적 이미지를 선택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가진 전부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풍경#2」(1964)같은 1960년대 중반에 만들었던 풍경화들을 위해 그는 미국차보다는 폭스바겐을 사용했다. 주된 이유는 적당한 포스터 이미지들의 선택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고 독일 제조업체가 도움이 된다고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아름다운 미국차의 포스터를 두 장 갖고 있었으나 그의 의도에 맞게 사용하기에는 너무 크거나 아닌면 부적당하게 묘사되어 있었다고 회고한다. 어떤 경우에서나 폭스바겐 딱정벌레들은 그 당시 미국에서 매우 보편적이었으면 문화의 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대체로 나는 내 자신의 문화로부터 선택한 요소들에 대해서만 편안함을 느꼈다. 나머지 것들은 어쨌든 너무 자의적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 한도 내에서 나는 내 주위에 있는 것을 사용했다. 따라서 나의 문화란 내가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문화적 이유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문화적 코멘트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인쇄된 이미지들이 유래한 광고판의 크기와 비례를 흉내 낸 큰 작품들의 연작 중 하나인 「정물#33」(1963)은 완전한 기성 식품- 넘쳐날 정도로 속을 채운 서브마린 샌드위치, 버드와이저 맥주 깡통, 디저트용 오렌지와 식사 후에 피울 폴말 담배 몇 개피를 실물보다 훨씬 큰 광고와 똑같은 기념비적인 거만함을 갖고 그리고 있다. 팔꿈치를 괴고 있는 「위대한 미국 누드#27」은 얼굴을 돌리고 있으며 특히 그녀의 입술을 축일 수 있는 시럽을 얹은 아이스크림, 소다, 그리고 밀크 쉐이크를 향해 돌리고 있다. 헬만 ‘리얼 마요네즈’의 거대한 병이 「정물#48」(1962)의 초현대적인 기계적 정밀성은 플라스틱 세븐업 병의 존재에 의해서, 양식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원래 사물과 똑같은 크기에 따라 나무로 정확하게 만들어진 대용품 천과 라이오에 의해서 그리고 시카고 스카이라인을 찍은 사진 포스터의 형태로 제시된 창문 풍경에 의해서 완성되어 있다.

유럽적인 주제를 미국적인 모티프로 변형시키는 것은 현대 미국 회화의 형식적 속성들에 대한 웨슬만의 왕성한 발굴 및 재해석과 병행되었다. 보는 이의 시각적 영역을 넘어서서 회화의 극단까지 밀어 붙이는 거대한 표면에 대한 선호는, 예를 들면, 이미 잭슨 폴록과 바네트 뉴만 같은 화가들의 특정 작품들에서 확립되어 있었다. 관심을 화면 전체에 균일하게 배분하는 ‘전면’구성으로 요소들 간의 균형이라는 유럽적인 구성개념을 대체하는 것은 폴록이나 쿠닝같은 행위 화가들뿐만 아니라 뉴만과 같은 색면 화가들에 의해서 1940년대와 1950년대에 만들어진 작품의 특징이었다.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형태들에 동일한 무게를 주는 요소들을 맞물림으로써 그리고 나중에는 변형 캔버스의 사용을 통해 화면 디자인을 창출하려고 노력하면서, 웨슬만은 의식적으로 구성에 대한 이 새로운 태도를 구상적인 양식으로 번안하려고 노력하였다.

결국, 미국추상화가들이 화면으로부터 관객에게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공간-즉 보다 정직하며 보다 활동적인 공간-을 위해, 뒤로 들어가는 환영적인 공간을 결정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실제 대상들을 화면 속이나 화면 앞에 놓고 결합시키는 웨슬만의 예술에서 전형적으로 그대로 표출된다. 예를 들면, 「정물#19」(1962)에서 그는 그의 고향인 신시내티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빵집에서 산 한 덩어리의 빵을 3차원으로 재현을 한 것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꼴라쥬 된 다른 요소들의 중첩이 의미하는 대상들의 층이라는 논리적 결론을 취하는 실제 공간 속에 억지로 끼워져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방문 기간 동안 그는 지방 회사들을 찾아다니면서 디스플레이 되어 있는 맥주와 청량음료 같은 품목들을 포함하여 그들이 갖고 있는 이런 성질의 것은 무엇이든지 요구했다. 물리적인 현존감을 과장하기 위해 단축되어 보여진 3차원의 빵덩어리로 인해 그는 3차원성을 시작하게 되었다.

“미술학교에서 나는 그림은 평면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선생으로부터 협박을 받았다. 내가 언젠가 그림에 꼴라쥬 한쪽을 붙이자 그는 다가와서 그것을 떼어내고는 ”이제 그것을 물감으로 그려, 왜냐하면 너는 화가니까“라고 말했다. 그와 같은 태도는 나에게서 잊혀지지 않는다. 비록 그동안 내가 3차원적인 요소들을 쌓아놓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내가 3차원으로 작업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지각했기 때문이다. 3차원의 빵조각은 내가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파고들어간 첫 번째 경우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형식의 앗상블라쥬는「위대한 미국 누드#48」(1963)같은 작품들에서 더욱 진전된 형식을 취하게 되었으며, 그 작품에서 카펫과 테이블 같은 실제 요소들은 전체의 통일된 인테리어의 재현에 기여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걸어 들어갈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 그와 같은 어떤 장소의 재현이기 때문에, 실제 사물들의 제시는 평면적인 요소들의 리얼리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높이는데 이바지한다. 실제성에 대한 이 같은 강조와 더불어,「정물#38」(1964)같은 작품에서처럼 실제의 시간을 보여주는 작동하는 시계와 어떤 지역 방송국의 방송도 수신하고 방영할 수 있도록 주파수를 맞출 수 있는 라디오를 포함함으로써 삶과 예술을 상호침투시키는 감각이 생겨났다. 「정물#31」(1963)은 실제 흑백 텔레비전을 결합한 몇 개의 앗상블라주들 중 하나였는데, 그것은 외부세계로부터 보내진 끊임없이 깜빡거리면서 움직이는 이미지가, 그것이 없었더라면 닫혀졌을, 정물로 재현된 세계에 끼어드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미국작곡가 존 케이지의 영향 하에, 다른 미국 작가들이나, 특히 ‘콤바인 페인팅’으로 유명한 로버트 라우센버그는 일상생활의 경험으로부터 그들의 예술에 우연의 효과와 예기치 못한 만남을 들여오는 하나의 방법으로 유사한 요소들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라우센버그가 1959년에 예술과 삶 간의 간극 속에서 작업하고 싶은 자신의 욕망에 대해 영향력 있는 글을 쓴 반면, 웨슬만은 훨씬 더 무표정한 방식으로 예술과 삶을 보다 직접적으로 대결시키려 하였다. 예를 들면, 라디오나 텔레비전 세트가 전파를 통해 보내진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계가 정확한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 중요했다. 웨슬만이 생각하는 예술작품은 세계를 단순히 코멘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앞에 완강히 존속하면서, 우리의 직접적인 환경의 총체적인 부분으로서 실제적인 시간 속에 과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1960년대 중반까지 웨슬만은 그의 그림에서 디테일들의 상당부분을 제거해내고, 많은 경우에 있어서 실물보다 큰 이미지들을 가능한 한 채색된 형태들로 간결하게 규정되어 있는 실내풍경이나 외부배경 속에 크게 그려져 있는 파편들로 간주하면서 크기의 확장과 내적인 형식에 모두 비중을 두었다. 아무리 단정적으로 모티프를 제시해도-그리고 실제 크기만 한 여성의 가슴이 재현되어 있는 것을 무시하는 것은 어렵다-그것의 효과는 본질적으로 동시대의 미국추상회화, 특히 하드에지 추상과 색면 회화에서의 발전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고도로 형식적인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 이미지들은 그 자체 넓은 색면으로 된 형태인 유려한 형상들의 만남에서 생기는 외곽선의 뚜렷함을 통해 생긴다.

웨슬만 작품의 점진적인 발전은 본질적으로 형식적인 문제들에 대한 일련의 반응이다. 그 과정은 본질적으로 지적인 것이 아니라 직관적인 것이다. 그는 이론이 아니라 시각적 증거로부터 진행한다. 발전의 중요한 측면은 조각에 대한 탐구이다. 이것은 1960년대 초 앗상블라쥬에 3차원적 요소들을 사용함으로써 그리고 약간 후에는 분리 설치되는 부분들로 이루어진 변형 캔버스와 회화들을 사용함으로써 처음에 시작된, 길고 느린 탐구의 최종 산물이다. 「정물#59」(1972)과 「정물#60」(1973)같은 작품들은 환조에 대한 그의 초기의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이것에 대한 강조가 정면에서 바라보았을 대 전체에 대한 부분들의 관계에 계속 두어졌지만 말이다. 즉, 이들은 스케일이 크고 각각의 이미지에 따라 분리된 대상으로 만들어진 물리적 실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회화로 간주되고 있다. 흡연자상(조각)과 특히 1978년 씨에틀에 설치된 튤립 같은 작품들과 함께, 그가 완전히 입체적인 이미지들에 형식을 부여하게 된 것은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웨슬만이 새로운 형식, 즉 금속작품들을 개발한 1983년에-그는 그 후 거의 전적으로 이것에만 관심을 쏟았다.-보다 더 극적인 변화가 그의 작품에서 일어났다. 이전시의 주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이 작품들에서 ,재빠른 낙서나 보다 정교한 드로잉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들은 크게 확대되어 손으로 또는 레이저의 도움을 받아 알루미늄이나 강철판으로 잘라져 있다. 거의 리모트 콘트롤에 의해 생겨나는 그런 이미지들의 감각은 금속 작품들에 굉장히 다양한 형태와 구성을 주는 시각적 개념들의 막대한 생산을 부추겼다. 그러나 그의 작품 내에서 그들의 위치는 그들이 그렇게 많이 그리고 그렇게 많은 순열로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넘어서는 것이다. 웨슬만에게 있어서 변화란 자기 자신의 재창조일 뿐이다. “그것은 스위치를 돌리는 것과 같다”라고 그는 설명한다. “이제 나는 완전히 다른 작가인 것이다”

금속 작품들에서 웨슬만은, 외견상으로 순전히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그의 예술에서 이전에 갈등했던 두 개의 충동들을 용케 통합시키고 있다.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그리고 표현적이고 개인적인 표현에 대한 공공연한 부러움을 가지고 출발했기 때문에, 그는 일부러 꼴라쥬 그리고 무명의 화면들을 사용함으로써 개인성에 대한 이 같은 강조에 반대했다. 금속작품들에서 그는 주관적 수공적 표현을, 공업적으로 정밀하게 만들어지는 단호하고 비개성적인 화면으로 제시하면서도 ,직관적인 과정의 증거로 보존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사용하는 또는 기존 사물들의 대용품들을 만드는 많은 방법을 이미 발견했기 때문에, 그는 이제 자기 자신의 드로잉들-그의 모든 예술의 가장 내밀한 면-을 그의 가장 대중적인 시각적 진술에서 복제되어야 할 기성 이미지로 사용하고 있다. 그 과정은 웨슬만으로 하여금 그가 이전에 수집한 이미지들을 다루었던 때와 같은 간격을 가지고 자신의 손으로 만든 산물들을 이용 가능한 모티프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스튜디오에서 보낸 수년과 오랜 기간동안 받았던 심리분석의 바탕은 웨슬만으로 하여금 너무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자기자신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여 행동하게 하였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해서 그것은 그가 새로운 형식에 이해 해방된 전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제 모든 그의 작품이 드로잉의 우선성에 기반해 있으며 새로운 작품을 산출하기 위해 그가 단지 하나가 아니라 무수한 스케치를 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그가 아직까지 드로잉 활동 자체에 대해 강한 혐오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 처음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아마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그는 이러한 저항을 극복하는 수단으로서, 그를 매우 힘들게 하는 활동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접근방법을 발전시켜야 하는 도전을 스스로에게 부과했던 것이다.

“나에겐 드로잉이 어렵다. 나는 드로잉을 싫어해서 그것을 무시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렇게까지 그것을 꺼려하지는 않으며 나는 오히려 그것을 더 즐기는 편이다. 나는 그것을 싫어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누드를 그리곤 했는데, 그녀는 너무 아름다워서 , 내 드로잉은 모델의 아름다움에 반도 미칠 수 없었다. 수년이 걸려서 나는 모델의 드로잉이 아니라 드로잉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이제는 드로잉이 내겐 더 재미있다. 왜냐하면 굵은 붓으로 그리는 방식은 좀 더 대담한 반면 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드로잉을 재빨리 한다. 빨리 그리는 게 좋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초창기에 나는 목탄이든 연필이든 아니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정복해버리려고 했으므로 적당한 것을 얻을 때까지 지우고, 그리고 또 지우곤 했다. 나는 꼭 그려야 할 때만 그렸다. 나는 채색하는 것을 좋아해서 드로잉하는 것을 견딜 수가 없다. 따라서 나는 재미로 드로잉하지는 않는다. 나는 연습하기 위해 드로잉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러했기를 바란다. 내가 해야만 했다면, 그것은 나의 눈과 손을 보다 잘 적응시키기 위해서였다. 나는 내가 진정으로 절실할 때 그리고 내가 이미지들을 필요로 할 때 또는 내가 어떤 것을 시도하고 탐구하기를 원할 때만 드로잉을 한다”

금속작업에 대한 흥미가 여전히 그러해서, 웨슬만은 표현의 일차적 형식인 캔버스 회화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회화의 청사진으로 써야한다고 걱정하면서, 예전처럼 힘들여 드로잉하는 대신, 그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자유로운 방식으로 자유롭게 스케치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낙서와 메모들의 분방함과 자발성이 가장 생생한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과거에 그가 레디메이드 모티프들과 오브제들을 사용함으로써 회피했었던, 부로부터 이미지를 만들어야 하는 걱정은 이제 낙서 행위에 의해 이미지들을 거의 무의식적으로 불러내는 방법으로 인해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다. 이런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전 과정에서 그가 경험하는 엄청난 만족감은 실패 없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다. 비록 접근방법의 변화가 너무 뚜렷해서 그것이 그에게는 ‘거의 분열된 성격처럼’보이겠지만, 웨슬만은 이전 작품의 주제를 더 피상적으로 모방했다기 보다는 이런 의미에서 자기 예술에 특징적인 높은 정신들을 계속 확장시켜왔던 것이다.

스스로를 쾌락주의자로 여기느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 영국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자신은 예술가로서 대부분의 시간을 쾌락주의자로서 보냈다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쾌락주의를 관찰하면서 보냈노라고 답변했다. 만약 그가 수영장 옆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을 그리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쉬고 있다기 보다는 바쁘게 일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평온한 가족 생활을 하고 스튜디오에서 매주6일, 매일 알찬 8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웨슬만은 자신에 대해서도 호크니와 똑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수긍한다. “나는 그런식으로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불행하게도 그것이 내 방식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태도와 틀에 박힌 일과를 그가 예술에서 보여주는 것과 똑같이 사실 그대로 설명한다. “나는 스튜디오에 갇혀 있는 작가이다. 나는 강박적으로 작업하는 사람이다. 나는 늘 작업을 한다. 내가 무엇인가를 위해 스튜디오를 벗어나는 시간은 거의 없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오로지 작업이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 유희이다.” 아마 이것이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불행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웨슬만이 가장 밀도 있는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은 예술을 만드는 것을 통해서 이며, 반대로 그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은 그 쾌감이기 때문이다.

-마르코 리빙스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