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욱의 바다: Imagination, Representation, and Communication

정영목(서울대 교수)

I. Imagination

최근 몇 년간 화가 오병욱은 줄곧 바다만 그려오고 있다. "내 마음의 바다," "생각의 바다," "이 세상 모든 시인들의 바다," 또는 "빛의 바다" 등 제각기 다른 이름들을 가졌지만,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수평을 사이로 잔잔한 물결이라 가늠할 시각적이자 촉각적인 물질의 옅은 파도가 하늘아래 한없이 고요하게 펼쳐져 있는, 하나같은 '마음의 풍경(mind scape)'들이다. 거기에는, 하늘과 바다뿐, 딱히 풍경이라 부를만한 자연의 요소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지극히 절제된 미니멀(minimal)의 풍경이기도 하다.
화가가 스스로를, 한 때, 신비주의자라 자칭했듯이, 그래서 그런지 그가 그린 바다는 매우 신비롭기까지 하다. 부처님의 속마음이 저러려니, 속세의 질곡을 씻어 내릴 물의 바다처럼, 아니면 하늘과 땅, 하늘과 바다, 천지간의 구분이 필요 없는 우주의 한복판인 듯, 양자간의 구분이 끝나며 전혀 다른 세계로 접어드는 그 접점의 피안(彼岸)같은 것. 화가의 바다는, 때문에, 이상적(ideal)이면서, 낭만적(romantic)이며 신비롭기(mystic)까지 하다.
한편, 화면(畵面)의 문맥상 화가의 그림을 굳이 '바다'라 국한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바다' 못지 않게 '하늘'이 차지하는 면적이 넓으므로. 예를 들어, 그림의 제목을 "바다가 있는 내 마음의 하늘"이라 해도 별 지장이 없다, 오히려, 문맥상 더욱 타당하다. 그러나 '바다'가 '하늘'을 수반하듯, 혹은 그 반대이더라도 결국은 둘 다 풍경을 구성하는 일상적인 자연의 한 요소일 것이라는 생각 이전에, 이 세계를 구성한 원초적(primordial) 속성이 이 둘과 맞닿아 있기에 우리에게 신비(神秘)로 오는 게 아닐까?
"무한한 상상력(영감)의 소유자"이기를 원했던 화가답게 그의 그림은 198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그 형식과 주제는 변화하되, 변화하지 않는 속내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상상과 재현 사이의 미묘한 회화적 마력을 그 둘의 힘으로 다시 복구해내는 일이었다. "심연가(深淵歌)를 배회하다 눈 덮인 산을 넘어 별이 빛나는 밤을 지나 드디어 바다에 이르렀다"고 화가로서의 지난 날의 여정을 압축하여 술회한 것도 기실, 상상과 관련한 작품의 주제가 변화해 왔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추상으로 풀어낸 , 등은 제목만으로도 화가의 신비주의적 태도가 들어나며, 어느 날, 히말라야 아마다블람 봉을 사진으로 본 충격을 시작으로 그려낸 상상의 흰 산들, 혜성을 찾아 헤맸던 실제의 기억과 함께 그려낸 별밤의 세계는 특히, 화가의 상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바다도 그러했다. 남한의 중앙 언저리쯤 되는 경상북도 상주가 고향이자, 다시 그곳에 화가로 정착하여 사는 그가, 바다와 일상으로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묻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화가의 일상과 전혀 상관없는 바다를 사진도 안보고, 어둠침침한 폐교의 교실에서 그려내는데…… 화가의 바다는 재현과 상상의 어느 접점쯤에서 실현되는 것일까?

II. Representation

재현에 관한 탈모던의 생각으로 그의 바다를 들여다보자. 즉, 화가의 바다 그림을 단순히 화가가 상상으로 바다의 이미지를 재현/표현한 것으로 보지 말자는 뜻에서 탈모던(postmodern)이란 말을 써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화가의 '바다'는 상상과 재현의 어느 접점에서 실현된, '순수'를 표상하는, '순수'를 의미하는, '순수'를 추구하는 분명한 태도와 의도를 가진 사회적, 문화적, 관념적인 성격의 목적체(目的體)이지, '바다'를 '바다'처럼 보이게 그린/그리려 한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는 뜻이다.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통적인 재현(representation)의 공식에는 세 가지의 실제요소가 항상 존재한다. 재현의 대상(a thing), 그것의 실제 이미지(it's actual image), 그것의 정신적 이미지(a mental image)로, 마지막의 '정신적 이미지'가 미술에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이미지(image)'이며, 화가가 '그린' 바다가 이에 해당한다. 바로 이 이미지를 보고 우리는, 혹은 필자처럼, 화가의 '바다'가 이상적(ideal)이네, 낭만적(romantic)이네, 신비롭(mystic)네 하는 비평적/선험적 판단을 가하게 된다.
'재현(re-presentation)'은 또한, 항상 'presence'라는 '현전(現前)'의 의미가 살아있어, "지금, 현재 우리에게 직면한 시공간의 그 무엇"이란 의미를 스스로 내포하고 있다. 때문에, 재현의 가치는 과거, 미래가 아닌 지금, 현재의 실제를 대체할 수 있는 동등한 등가(等價)의 유사한(resemblant) 그 무엇에 있다. 그래서 어떤 미술사학자(David Summers)는 '재현'을 경제행위에 있어서의 '현금(cash)'과 동등하게 취급하기도 한다. 이것은 '재현'이 내포한 '현전(現前)'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이 연장선상에서, 한편, 재현이 창조한 '동등한 등가의 유사함'은 원본이 아니다. 이것은 언어를 재창조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언어처럼, 그 유사함은 우리에게 기억과 느낌으로 원본과 동등한 힘을, 혹은 원본을 능가하는 이미지의 힘을 선사하기도 한다. 바로 이 힘이 '상상(imagination)'이다. 재현은 태생적으로 '상상'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물건을 '현금'과 거래하는 경제행위도 '상상'이 있으므로 가능하다.
화가의 바다는 바로 이 지점에서 전통적인 '재현'의 공식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벗어나고 있다. 화가의 바다가 '상상'이 개입할 충분한 여지를 확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바다처럼' 보이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원근법(perspective)과 물결의 이미지를 화면에 실제의 물질로 돌출시켜 재현한 입체감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화가의 바다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매우 재현적이다. '그려진' 재현의 바다를 어느 일정 거리에서 보고 있노라면 실제의 바다보다 더 실제 같은 바다를 대면하는 것 같은, 빠져드는 착각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III. Communication

재현의 기술 중에서 '선원근법(linear perspective)'이야말로 사양 사람들이 개발한 최대의 업적임에 틀림없다. 이로 인하여 재현은 조화와 통일성을 갖게 되었고, 우리의 시지각을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는, 즉 계량적인(quantitative) 측면에서의 모더니티를 이행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것은 특히, 회화의 가상공간구조를 형성하는 근간이 되어 이야기(narratives)의 주제의식(subjectivity)을 고조/향상시키는 메타포(metaphor)의 역할로까지 진전했다.
바꾸어 말하면, 원근법은 세계를 바라보는 객관적인(objective) 공간의 규범보다, 주관적인(subjective) 시각의 공간구조에 더욱 영향력을 미쳐, 마치 '상상'에 날개를 달아준 형국이랄까? 모던의 관점에서는 그렇다.
한편, 재현과 원근법을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자. 정치, 사회적인 측면에서 주제를 전달하는 보다 원활한 수단을 개발한 것이 원근법이라 한다면, '재현'은 곧 '소통(communication)'의 문제일 수 있다. 즉, '재현'이야말로 언어의 장벽을 넘어 인간의 정서와 생각을 전달하는 '소통'의 가장 보편적인 수단인 셈이다. 또한, 여기에는 어떠한 형식과 태도로든 제 삼자(관람자/소통)의 개입을 전제하고 있다.
화가가 '상상'으로 '재현'한 바다 역시 나는 '소통'의 문제로 본다. "나는 내면의 세계를 여행하면서 느끼는 감동과 충격을 표현하고 전달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듯이, 화가 역시 소통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화가는 화면에서 바다의 깊이감(가깝고/ 먼)을 위해 수학적인 '선원근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물결처럼 돌출시킨 실제의 물질적인 굴곡이 옅어지면서 서서히 우리의 눈에서 사라져 수평선으로 이양하는 '시선의 이동'을 '원근(遠近)'으로 치환했다. 수평선이 하늘과 맞닿는 대부분의 평면은 오히려 '대기 원근법(aerial perspective)'의 아스라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보는 이의 '상상'을 더욱 배가시킨다. 빛과 색, 그리고 질감의 실질적인 두께로 조정되는 미세한 깊이의 화면이 마력처럼 우리를 바다로 끌어들인다.
마지막으로, 화가는 바다로 '순수(na?ve)'를 말하고 싶었다. 아니, 소통하기를 원한다. 화가가 지금껏 선택한 주제들-흰 산, 혜성, 무지개 등-모두가 자연과 함께 인간이 되찾아야 할 '순수'의 징표들이다. "순수가 진술의 차원을 넘어, 표현의 차원을 넘어, 행동의 양식으로 뿌리내리기"를 원하는 화가는 그림으로 '순수'의 소통을 실천하고자 한다. 오병욱의 바다는 그런 바다다. 그린버그(Greenberg)식의 '순수'와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