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PH BEUYS 요셉보이스 (1921~1986)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이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가였는데 그 경험이란 '바로 2차 세계대전 당시에 그가 전폭기 조종사로 종군 하다가 추락, 부상을 당해서 크리미아의 타타르 인에게 구사일생으로 구출되었다는 일화와 그들의 간호로 동물의 지방과 펠트로 몸을 감싸진 채 목숨을 건진' 사건이었다. 그는 그 후로 자신의 작품에 일관되게 지방과 펠트 천을 사용 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 경험을 계기로 의사가 되려던 것을 그만두고 예술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는 인류애와 질곡으로부터의 자유, 상처의 치유 등을 표방했는데 아마 2차 대전 당시 인류에 대한 학살을 저지른 독일군으로서 부상당한 자신과 자신을 구해준 타타르인과 의 만남이 예술관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의 삶과 예술을 철저 히 동일시했으며 '모든 사람은 미술가'라고 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 미술가라 는 것은 누구나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는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광범 한 사회적 맥락, 바로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순환', '흐름' 의관계에서 이해되어진다. 그는 우리 삶 자체를 거대한 순환과 소통으로 보았고 예술이 사회 속에서 소통을 도와주고 가능케 하는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모든 이가 예술가'라는 것은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창의력을 바탕으로 한 건전한 노력이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조화로운 사회의 흐름을 도와준다면 바로 그것이 예술이라는 것이며 조각 개념을 확장 시킨 '사회적 조각', '사회적예술'의 개념이었다.

그는 '순환'과 '흐름을 근본적인 에너지의 순환, 즉, 고체 액체, 기체와 같은 순환으로 열에 의해 형태가 바뀌며 형태 변화보다도 변화과정 자체를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 이러한 물리적 변화는 인간의 근본적 성품(액체)이 문화나 역사의 시련(열을 빼앗음-차가움)으로 인해 굳어진 것(근본을 잃어 버림, 고체)을 인간성, 인간의 따스함(열을 가함)으로 녹여 근본(액체)으로 돌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재료는 주로 꿀, 밀랍, 지방, 버터, 마가린등과 같은 열에 의한 용해 가능한 자연물이었다. 벌이 꿀을 자신의 몸 속에서 밀랍으로 바꾸어 집을 짓는 과정이 인간의 신진대사나 사회구조와 비슷하다고 보았다. 여기서 그는 신지학자 루돌프 스타이너(R. Steiner)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방이나 버터, 밀랍과 같은 재료는 언제든 열로 인해 형태를 바꾸며 ,근본적으로는 '에너지의 순환'을 나타내며 그의 조각개념은 이렇게 '변화와 전환의 가능성'으로 제시되었다. 펠트는 동물의 가죽과 털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운 북유럽에서는 체온 유지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보온 재료이다. 동물은 그에게 있어서 자연을 상징하며 인간이 잃어버린, '심리적이고도 영적인'에너지의 소스였다. 동물의 지방과 펠트를 자주 사용하였고 죽은 토끼나 사슴, 엘크, 양, 백조 등 을 사용했는데 특히 토끼는 그가 자신과 동일시 했던 것으로 예로부터 여러 문명에서 신성시 된 동물로 보이스에게는 토양과 생식과 육화(肉化)를 상징 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것 인가?" (How to explain pictures to a dead here?) 에서 그는 토끼를 안고 세시간 동안이나 그림을 설명하고 '사람들보다도 죽은 토끼가 더 큰 직관을 가지고 있다'고 역설 하였다. 또 그는 여성을 신성한 생명의 모태로 따뜻함의 상징으로 여기고 구리를 여성의 따듯함을 가지고 있는 재료로서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구리 0.3% 금 속성연고 제품 Cuprum 0.3% Unguentum Metallicum>(1978-1986)에서는 자신이 사용하던 구리성분이 함유된 연고를 사용하였는데 구리는 난도체 성분으로 보이스에게는 여성적 요소를 상징하는 것이다. 밀랍에 온 길을 전달하기 위해 안에 작은 구리 조각들을 흩부려 놓았는데, 그것은 단단한 형태를 여성적 따스함으로 액화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면에서 보이스는 여성을 자신의 이론을 구현하는 희망과 에너지의 전달체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기도 하였다.
그의 사회적 예술관에서 중요한 것이 예술가에 대한 그의 입장이다. 더 나은 사회로 의 발전을 위해 예술가는 '순환'과 '흐름'을 좀 더 원활히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재료를 사용해 흐름을 다스리는, 인간과 자연의 중간자적 입장에서 둘 을 화해 시키고 소통 시키는 '주술사 '가 되야 한다 했다. 그의 철학으로 그는 사회를 바꾸는 정치적인 행동과 수많은 퍼포먼스로 예술관을 표현하였다. 환경에 대한 관심과 정치적 활동으로 녹색당에 가입하여 출마했으나 떨어진 일도 있고 자유로운 환경에서의 학문연구를 위해 ''자유 국제 대학(FIU)"을 설립 하기도 하였다. 또한 사회에서의 사람들 과의 대화를 통한 의사소통을 중시하여 수많은 토론회와 강연회를 열기도 했고 1972년 '도큐멘타 5'에서 그는 무려 100일동안이나 사람 들과 민주주의와 미술 그와 연관된 이슈들을 가지고 진지하게 토론을 벌였다

특이한 철학으로 그를 다른 어떤 그룹이나 단체에 소속 시키는 것은 무리 이나 그가 평생에 단 한번 '플럭서스'라는 단체의 일원으로서 활동을 했었다.
그의 첫 주요 행위 극으로는 < 시베리안 심포니, 1악장 siberisn Symphony, 1st Move- ment>가 있는데 뒤셀도르프에서 첫 플럭서스 공연으로 선보였다. 플럭서스(Fluxus)는 '움직임', '흐름'을 나타내는 라틴어로 '고정된 예술 개념을 거부하는 대신, 어떤 획일적인 교리에 의해 제한 받지 않고 전적으로 자유로운 예술을 지향함으로 서 보이스의 접근 방식과 여러 관점에서 매우 유사함을 나타낸 국제적인 예술 운동이었다.' 1962년부터 보이스는 이 활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주요 작으로는 <마르셀 뒤샹의 침묵은 너무 과대평가 되었다>, <대장>,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것인가>등 이 있다. 그의 플럭서스 활동 중 가장 절정에 달했던 것은1973년 뉴욕의 르네 블록 화랑에서 있었던 <코요테, 나는 미국을 좋아하고 미국 은 나를 좋아한다 I like America and America likes me>였다. 이 퍼포먼스는 그가 미국의 케네디 공항에서부터 머리에서 발 끝까지 온 몸을 펠트로 감싸고 구급차에 실려 7일 동안 코요테와 함께 생활하게 될 화랑으로 실려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 기간 중 그는 개인적으로 동물에게 말을 걸었고 관객들은 그와 격리되어 있었다.매일의 의식에는 코요테와의 일련의 교환이 포함되어있었다. 그가 가지고 들어간 여러 가지 것 들을 (펠트, 보행용 지팡이, 장갑, 회중전등, 월스 트리트저널)소개하며, '코요테는 마치 자신이 하는 방법으로 인간의 존재를 승인하는 것처럼 그것을 발로 긁으면서 엉덩이를 걸쳤다.' '코요테'는 보이스에게 있어서 '아메리카적인' 행위, 즉 아메리카 인디안 박해의 역사와 '합중국과 유럽의 모든 관계'를 반영 한 '코요테 콤플렉스'를 의미하였다. "나는 코요테 에게만 집중하였다. 나 자신을 격리 시키고 절연하여 코요테 이외에는 아메리카의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과 역할을 교환하였다." 보이스의 이러한 행위는 '이데올로기의 자유 관념을 향한 변화'를 나타낸 것이다. 요셉 보이스의 이러한 예술관념은 인간에 대한 박애정신과 환경운동가로서의 자연에 대한 경외 같은 것이 잘 보여준다. 그는 물질 문명에 반대하여 샤먼이나 주술 등 토속적인 신 화와 종교에 관련된 재료로 상징과 의미를 부여한다. 미술사가이며 평론가인 도널드 커스 피트(D. KUSPIT)에 의하면 '현대예술의 큰 두 줄기를 미디어 미술과 치유의 미술로 보고 앤 디워홀을 전자의 대표로 보고 보이스를 후자의 대변자로 파악하였다.' 그는 레디 메이드를 사용하여 다다의 뒤샹과 공통점을 갖기도 하지만 파괴적이며, 반정치적, 저항적 반항적 이었던 다다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상에서 출발한다. 뒤샹이 "모든 것은 예술이 될 수 있다." 라고 한 말은 모든 사물이 작가에 의해 마음대로 예술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작가중심 의 발언 이었고 그에 반해 보이스의 "모든 이는 예술가"라고 말 한 것은 작가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개 개의 노력과 상호협력을 중요시한 민주적인 발언이었다. 그리고 그의 유기 체에 대한 관심, 사회를 하나의 거대한 통일체로서 파악하고 사회 구성원들 간의 화합과 소통 을 강조하고 삶 자체를 순환의 법칙 속에서 이해하려 했던 태도, 물질과 비물질의 구조를 초월하여 상징과 그 속의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던 그의 태도는 동양적인 물아일체(物我一體) 와도 맞닿아있는 것이었다.
그만의 독특한 재료로써 오늘날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인간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 하게 하였으며 자신 스스로 그것을 평생 행동으로 실천하여 대중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그로 인해 (그의 난해하고도 독특한 예술세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20세 기 어떤 예술가 보다도 인기 있는 작가 중 하나로 꼽힌다. 그가 뒤셀도르프의 교수로 재직 중 그를 따르는 학생들은 너무나도 많았으며 그가 다니는 곳은 어디든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플럭서스 시절 백남준 과의 친분도 많이 알려져 있지만 백남준 자신도 보이스를 동료이자 예술가로서 정말 존경하는 사람 이라고 했다.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보이스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그 영향을 끼치고 있고 그의 확장된 예술개념은 현대 예술에 무한한 가능성을 부여하여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예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