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노의 화분: 새로운 삶의 미학을 향하여” - 고동연 (미술비평)
프랑스 신사실주의 계열의 작가 장 피에르 레이노의 화분에는 식물이 자라지 않는다. 생명이 움터야 하는 화분의 윗면에는 정적만이 감돈다. 매끈한 화분의 겉면과는 대조적으로 화분의 위쪽에는 흙이나 식물대신에 버블모양의 물질이 채워져 있다. 혹은 화면 위쪽은 하단과 같은 재료로 마감되어 있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경쾌하고 친숙해 보이는 화분이 가까이에서 관찰하게 되면 메를로 퐁티가 일컫는 침묵이나 억제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레이노는 왜 그와 같은 선택을 하였을까? 식물이 자라지 않는 레이노의 화분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경험을 유발시키고 있는가?
레이노는 지난 40년간 화분이라는 한 모티브에 매달려 왔다. 1958년 원예 학교를 졸업한 후부터 그가 사용하기 시작한 화분의 형태 역시 동일하게 남아 있다. 그는 다니엘 뷰렝이나 장 크리스토와 같은 작가들과 동년배로 1960년대 미술계에 뛰어 든 이후 화분을 본 따 만든 오브제를 들고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대표적 설치 미술가인 크리스토가 천을 가지고 전 세계의 도시와 풍경들을 포장해 온 것에 비견될 만하다. 1971년 이스라엘의 미술관 앞 광장에서 우리는 레이노식 화분들이 종대로 줄을 서서 설치되어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1996년에는 자금성의 광장 앞에 그리고 1998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퐁피두 현대 미술관 앞 광장에 그의 거대한 금색 화분이 각각 선보였다.
이번 더 컬럼스 화랑에도 이제까지 레이노가 제작하였던 화분들이 총망라되어서 등장하였다. 전시장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거대하고 빨간 화분은 한편으로는 친숙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위압감을 준다. 어린 아이 장남감에서나 사용될 법한 따스한 감수성을 유발시키는 빨간색은 관객에게 편안하게 다가온다. 동시에 관객의 키를 훌쩍 넘는 거대한 크기의 화분은 환상적인 인상마저 준다. 특히 금박의 종이를 붙여서 완성한 금색 화분의 표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이내 신비로운 느낌에 빠져들게 된다.
그런데 일상적인 오브제로부터 출발한 작품들을 접할 때 우리가 공통적으로 고심하게 되는 것은 바로 해석의 문제일 것이다. 예술작품이 되기에 너무 일상적이고 하찮다고 여겨져서 일까? 레이노의 경우에도 우리는 화분의 의미에 집착하게 된다. 게다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레이노의 화분이 여느 화분과는 다르다는 점은 우리를 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화분의 윗부분은 일종의 버블과 같이 응어리 진 물질이나 혹은 같은 재질로 덮여 있다. 레이노의 “괴이한” 화분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하여 미술비평가들이나 미술사가들은 레이노 작가 자신의 말을 자주 인용하곤 한다. “원예학교에서 꽃을 기르는 법은 배웠지만, 꽃들을 죽음으로부터 막는 법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시멘트를 채워 넣음으로써 또 다른 희생을 (꽃이 죽는 것으로부터) 막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레이노의 발언은 아버지의 죽음이후로 한동안 정신적인 장애를 겪었다는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함께 그가 오랫동안 집착하고 있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상기시킨다.
그렇다면 과연 레이노는 단순히 죽음 자체를 부정하려는 의도에서 화분을, 그것도 위가 막힌 화분의 모양을 사용하고 있다는 말인가? 물론 레이노는 생명을 키워내는 수단으로서 화분의 통상적인 의미를 부정하여 왔다. 이를 통해서 생명 뿐 아니라 모든 생명들에게 필수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조차도 거부하여 왔다. 그러나 동시에 죽음을 거부하기 위해서 생명조차도 억누르려고 노력하는 그의 힘겨운 막아내기는 새로운 단계를 암시하기 위한 상징적인 행위로 해석되어 질 수 있다. 여기서 막혀 있는 레이노식 화분의 상태는 유태인의 경전이 정의하는 답보 상태를 연상시킨다. 유태인 경전에 따르면 광야에서 40년 동안 유태인들이 방황할 때 들고 다니던 세 가지 물건들이 있었는데 첫 번째 물건은 조화를 그리고 두 번째 물건은 징벌, 타락을 그리고 마지막 물건은 답보 상태 혹은 정체상태를 의미하였다. 여기서 답보 상태를 암시하는 메라리는 가장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왜냐면 이것은 단순히 죽음이나 혹은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의 중간에 위치한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죽음으로부터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는 단계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레이노식 화분의 꽉 막힌 형태 또한 새로운 전환기를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이제까지 그의 화분들이 설치되었던 장소들은 한 세대의 종말과 그리고 전환의 역사를 상징하는 곳들이어 왔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 자금성, 하우스만의 옛 도시를 허물고 새롭게 만들어진 퐁피두 미술관, 이러한 장소들은 파괴의 역사나 노스탤지어아등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동시에 자금성의 몰락 이후, 그리고 파리 구 시가지의 몰락 이후 이 장소들에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우리는 목격한다.
그래서인지 레이노의 동일하게 생긴 많은 화분들은 일종의 과정을 보여준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이것들은 단순히 죽음의 두려움을 쫒아내기 위한 수단을 넘어서서 새로운 것을 준비하는 도구에 해당한다. 특히 레이노가 젊은 나이에 작품 제작을 할 때 직접 화분들을 채워 넣거나 마감을 하는 모습은 더욱 인상적이다. 바닥에 늘어진 화분들은 그의 편집광적인 성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이미지는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서 새로운 단계를 준비하는 작가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더 컬럼스 화랑에 즐비하게 놓인 화분들 또한 이와 같이 죽음과 새로운 미래라는 두 가지 메시지를 담고 있다. 물론 얄궂게도 그의 화분들은 너무나도 예쁘장한 색깔들로 장식되어 있다. 덕분에 얼핏 보기에 닫힌 화분의 의미가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대신 화분을 장식품 정도로 여기게 될 위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양한 면모들은 시간을 두고 보면 각각의 화분이 일종의 과정임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아니 다양한 크기의 화분이 지닌 기능성을 박탈하고 새로운 언어, 혹은 침묵의 언어를 만들어 내는 과정 말이다. 이렇듯 아름답게 생긴 화분들의 이면에는 과거와 미래, 종말과 시작, 억제와 치유의 서로 다른 의미들이 충돌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를 유명하게 만든 금색의 화분이 더욱 더 생명력을 발한다. 연금술사와 같이 “금”이라는 매체를 이용하여 레이노는 새로운 삶의 미학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고동연
뉴욕시립대학교 (City University of New York: Graduate Center) 미술사학과 미술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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