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사물을 어떻게 이해할까? 어느 방에 들어가면 사람은 자신이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했음을 인식함과 동시에 셀 수 없이 많은 새로운 정보의 폭포 속에 오감을 적시게 된다. 색과 모양, 질감, 냄새, 소리,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감각적 요소들은 개별적으로 부유하고 있는 듯 하지만 인간의 뇌는 이를 순식간에 응축된 하나로 엮어 낸다. 실제로 인간은 이러한 종합 능력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우리 주위에 객관적으로 관찰 가능한 물리적 세계가 존재한다고 자연스레 말할 정도다. "그녀는 마티니 한 잔을 마시고 있었다", 혹은 "그는 빨강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라는 단순한 묘사를 보는 즉시 할 수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일련의 인식적 사건들을 우리 뇌는 재빨리 프로세스 해내기 때문이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물리적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는 가정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이 존재한다고 믿을 만큼 서로 비슷한 현실 세계를 의식적으로 인식해내는 인간 뇌의 능력에 있다. 만약 우리의 감각 기관이 우리의 뇌에 보내는 엄청난 양의 정보를 고려해 본다면, 방에 발을 들여 놓는 찰나에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그 빨간색과 셔츠라는 별개의 개념을 똑같이 연결 시킨다는 것은 믿기가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왜 서로 다른 두 사람의 한 방에 대한 기억이 조금이라도 같게 되는 것일까?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Michael Craig-Martin)의 작품을 보면 이 질문과 비슷한 의문을 갖게 된다. "평면에 선과 색으로 이루어진 외형이 서로 다른 두 사람에게 어떻게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보다 복잡하게 말해 본다면, 왜 사람들은 의자나 양동이 같은 사물의 이미지를 말할 때 그 사물에 대한 설명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 사물 자체로 여기는 것일까? 크레이그 마틴은 우리가 현실을 이해하는 방법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방에 들어가거나 어떤 작품을 볼 때 어떤 것을 인식하나? 입수한 정보(색, 선, 평면, 공간)를 어떻게 정리해서 의미 있는 형태를 만들어 내는가? 사물과 그 사물이 점유하는 공간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나? 인간이 지각하는 것을 의미 있는 것으로 인식할 때 색은 어떠한 역할을 하나? 간단히 요약하자면,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하나?
크레이그 마틴의 작품을 보면 그 압도적이며 놀라울 만치 단조로운 분위기에 어리둥절한 기분에 빠져들게 된다. 마젠타나 라임, 초록과 터코이즈 블루와 같은 강렬한 색의 평면 위에 그만큼 선명한 노랑색 의자나 핑크와 자주빛의 소화기, 빨강과 보라의 변기가 떠 있다. 이 색들이 주는 힘은 즉각적이고 강렬하다. 저항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며 다소 압도적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들은 순도 높은 색의 존재감으로 다가와 낚아채듯 유혹한다. 그 어느 누가 250 평방 미터에 달하는 마젠타 평원 앞에서 꼿꼿이 서 있을 수 있을까? 유혹적인 이 색의 평면은 그러나 한 편으로는 동시에 숭고함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우리는 순간 자아와 분리된 의식 속에서 이성적 설명과 이해가 끼어들 수 없는 즉각적인 감각적 체험에 빠져들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와중에도 우리는 스멀스멀 피어 오르는 의문을 억제할 수 없다. 왜 전혀 상관 없는 듯한 색으로 가위며 핸드폰이며 의자를 칠했을까? 이 이미지들은 놓인 공간과 어떠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을까? 그것이 나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크레이그 마틴의 작품이 주는 감각적 임팩트는 보는 이들을 재빨리 현실의 세계 위에 발을 디디게 할 만큼 충분히 강력하다. 우리는 우선 우리가 사물을 대하는 그 순간 갖는 최초의 반응을 이해해야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본의 아니게 일사 분란하게 뻗어 나가는 감각의 촉수들이 이러한 절차를 방해해 그 이미지가 갖는 순수한 의미를 자문해 보기가 불가능하게 된다.
작품의 소재는 친근하기도, 낯설기도 하다. 누구나 알아보기 쉬운 사물들이 현란한 색으로 칠해져 있다. 의자, 선글라스, 신발, 컵 등 일상 생활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량 생산 제품들이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무심히 사용하거나 지나치는 사물들이다. 평범하다 못해 진부하기까지 한 이러한 사물들과 전혀 평범하지 않은 색을 병치해 놓은 모습 속에서 혹자는 팝 아트의 느낌을 읽어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심히 들여다보는 사이 그러한 연관성은 금새 사라지고 만다. 팝 아트에서의 소재가 실제 있었던 제품을 묘사한 것이라면 크레이그 마틴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선과 색의 조합은 실제 사물을 재현하고 있지 않다. 묘사된 의자나 핸드폰은 그의 작업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소유했거나 보았던 사물에 의해 영감을 받았겠지만 이 이미지들은 기능에 의해 분류된 사물들의 대표적, 사실적 재현인 것이다. 대표적 의자, 대표적 신발처럼 동일군에 속하는 사물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정보나 성질을 추려서 묘사한 그림이다. 따라서 어느 고유한 사물이라 지칭할 만한 특정 정보를 내포하고 있지 않다. 작가는 언제나 똑 같은 의자와 사다리, 핸드폰을 그린다. 이 속에 뭔가 미묘한 패러독스가 숨어있다. 모두 우리가 사용하는 사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어떤 핸드폰도 크레이그 마틴의 핸드폰과 똑 같이 생기지 않았지만 동시에 또 그렇기도 하다. 이 이미지들은 사물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을 분류하고 구별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인식의 도구의 묘사)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혹자는 작가가 팝 아트 보다는 오히려 미니멀리즘에 실질적으로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작가 개인 혹은 사회적 내러티브를 사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작품 그 자체가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관개에게 깨칠 수 있는 힘(감정적, 미적 그리고 지적인)으로 예술을 구현하고자 했던 미니멀리스트들의 바램을 크레이그 마틴도 그의 작품 속에 전제로 하고 있다. 작가는 그의 작품이 관객으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의미를 구성해 내게 유도한다. 보이는 것을 해석하는 능력과 욕구를 관객의 자의식으로부터 끌어내며 그 속에 내재된 경험을 제공하는 그의 작품에는 아무런 도구가 필요 없다. 하지만 이해를 위한 명백한 실마리나 사인이 없어(간혹 너무 많기도 하지만) 의미는 철저히 작품 속에서 태어나 작품 속에서 끝을 낸다. 크레이그 마틴은 소위 축소적 강화(reductive intensification)라 불리는, 이미지를 단순화시켜 오히려 그 잠재된 의미를 증폭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특정 정보를 내포하지 않는 그의 사물 이미지가 그 사물이 속하는 군이 나타낼 수 있는 무한한 의미를 가능하게 하듯이 의자나 사다리, 핸드폰은 관객 각자가 그 사물에 대해 가지고 있는 기존 경험을 판형(板型)처럼 사용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 이로써 각자 그 이미지와 자기 나름의 의미와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ㅁ더 컬럼스 갤러리 대표 장동조